프롤로그부터 인상적이다.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걸요."
과연 저 말에 공감을 표할 사람이 많을까?
-나는 저렇게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 아닌지라, 생각되로 되지 않아서 발생하는 일은 주로 부정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체념하는 임계치만 낮아졌고, 빨리 훌훌 털어버리는 능력이 높아졌다.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실망할 것도 없으니까.'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는 않는 게 더 한심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 말에 따르면 나는 린드 아주머니가 맞고, 그래서 주변에 빨강머리 앤처럼 충고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적어도 나에게는 정답이다.
그렇게 하는 방식이 나에게는 맞는 퍼즐이다.
하지만, 나도 알고 있다. 이런 나의 사고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발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렇다면 주저 앉지 않고 어떤 방향으로든 움직여야 한다.
움직이는 만큼, 경험하는 만큼 내가 얻어간다.
"이런저런 행복학 관련 책들을 읽다가 내가 느낀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나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직업적 성공, 발전적 진화, 자아 성장에 과도하게 관심이 큰 탓에, 나 이외에 다른 사람과의 진정한 관계에 투자하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해서 명확하게 써두고 있다.
행복해지는 연습과 노력을 해야한다.
나이와 행복의 관계를 조사한 결과 60-70대의 노인들이 항상 더 행복했다고 한다.
그들은 희노애락을 전부 겪었고, 살아갈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에서 모두 자유롭다. 그저 오늘의 순간들에 집중한다.
어렸을 때부터 빨리 늙고 싶었다. 그리고 멋있게 늙고 싶었다.
몇 번의 상실을 겪고 나서는 인생에 욕심을 부리는 것이 의미가 없음을 느꼈다.
그저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잘하고, 항상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래서 나를 알았던, 나와 연을 맺었던 사람들은 나의 그런 모습을 더 좋아해줬다.
그래도 매 순간을 완벽하게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켜야 하는 순간들이 너무 많았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현재의 빛나는 순간들을 놓쳐버렸다.
그것을 먼 미래에 후회하기 싫어서 현재의 순간들을 잡으면, 이도저도 아닌 결과물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행복이란 뭘까?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
이 질문을 수없이 던져도 답은 항상 나와있다.
답은 너무도 단순하고 자명하다.
결국 마음가짐을 다르게 해야하고, 스트레스를 관리 해야 한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놓치지 말아야 하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달려야 한다.
"세상을 천천히 응시하는 일은 나의 마음을 꼼꼼히 읽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정말로 '나의 야망'인가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몰려 쫓기듯 하고 있는 일을 자기 의욕으로 착각하고 나를 소진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는 일이다."
-그녀의 생각과 글이 왜 내 마음을 움직였는지 알게 되는 구절이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나와는 다른 사람과 연을 맺으면서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흡수하고 수용했다.
그러면서 나를 다듬어갔고, 나를 완성하려고 노력했다.
아주 작은 부분이더라도 세심하게 다듬었고, 그 다듬는 과정을 게을리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를 들여다봤다. 항상 나 자신을 다듬으면서 객관적으로 나를 돌아보니,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실수를 줄여나갔고, 핵심에 더 금방 도달할 수 있었다.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게 아니다. 사람은 다만 천천히 변한다. 어떤 것도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른 곳으로 이동 중이라는 걸 알게 해준 건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 사람은 천천히 변한다. 나무의 이파리가 물들듯이, 열매가 익어가듯이 서로의 상호작용을 받으면서 변해간다.
그 과정이 너무 천천히 진행되어서 모를 뿐.
나 역시 2년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고, 저 먼 10년 전과는 또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인생은 천천히 변하면서 나를 다듬어가는 과정이고,
그렇게 완성되가는 것인가보다.
"우리는 분노의 건강한 기능을 거세당하거나, 상실한 채 살아간다. 마음의 응어리를 풀지 않고 놔두면, 그것이 남기는 무의식의 상처는 꽤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힌다. 화를 내야 할 상대에게 분출하지 못한 짜증은 마치 중금속처럼 우리 몸속에 차곡차곡 불순물로 축적된다. 짜증이나 신경질의 화살은 결국 나를 향하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화를 내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예전에는 분노의 건강한 기능을 믿었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언젠가 '분노의 건강한 기능을 거세당한' 남자를 만났을 때, 나는 그의 방식을 배워버렸다. 한 번도 내게 분노하지 않은 그는, 분노를 표출한 나를 '어린애' 취급을 했다. 그게 너무 기분이 나쁘고 자존심이 상해서 나도 거세했다.
분노를 거세하는 것이 때로는 도움이 되곤 했다.
프로페셔널해보였기 때문이다. 침착해지는 것에 익숙했고, 나의 감정을 더 잘 컨트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삶이 AI와 다른 것은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래서 거세된 내 분노를 다시 살릴 수는 없어서, 분노를 마음껏 표출해도 되는 장소를 골랐다.
야구장, 노래방 같은 내 안에 남은 노폐물과 스트레스를 다 던져도 되는 그런 곳.
그게 꽤나 효과적이었다. 건강하게 풀어내니까 내 정신도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곤 했다.
"부모는 종종 자기 불안을 아이에게 투사하고, 자신이 풀지 못한 인생의 숙제를 아이가 반드시 풀어주길 바란다고, 그래서 아이에게 자신이 지고 있던 무거운 마음의 짐을 의도치 않게 넘겨준다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조건 없는 사랑처럼 보이는 부모의 사랑조차 폭력이 될 수 있다."
-이 구절은 내가 비혼, 비출산을 고민하고 마음이 기울게 되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를 대변한다.
나는 꽤나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하지만 여느 인생사가 그렇듯이, 흥망성쇠의 그림자가 우리 가정에도 깃들었었다.
그리고 그 망과 쇠의 순간들이 미성숙했던 내가 겪어내기에는 크기가 컸고, 무거웠다.
그래서 상처로 남았고, 나는 생채기를 안은채 자라났다.
언젠가 겪어야 할 순간들이었다면, 일찍 겪은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 생채기들을 마주하는 순간들이 올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어쩌면 나도 똑같이 나의 짐을 아이에게 부과할까봐 비출산을 생각했다.
'내 아이를 완전히 행복하게, 내가 겪은 상처나 아픔 없이 길러낼 수 없다면..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나도 힘들테니 아이가 없이 사는 것은 어떨까'라는 결론에 내렸었다.
"인간이 언제 위로받는 줄 알아? 쟤도 나처럼 힘들구나! 바로 비극의 보편성을 느낄 때야."
-내가 나에게 상담을 요청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방식이었고, 내가 위로가 필요할 때 듣고 싶었던 방식이었다.
내가 비극을 겪었고, 힘든 일이 있었다고 털어놓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자존심을 부리지 않아야 가능한 일이다.
"인생의 목표를 행복에 맞추면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해지기 힘들다는 걸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행복은 완결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과정 중에 일어나며,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심리학에는 '행복의 평균값'이란 용어가 있는데, 이 말은 인간의 행복이 적정선을 넘어가면 더 이상 증폭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행복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 중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것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우리가 의도적으로 해야 할 것은 '뭔가 하기 위해' 달리는 게 아니라, '뭔가 하지 않기 위해' 때때로 멈춰 서는 것이다."
예전에 그런 짤을 본 적이 있다.
'행복하려고 돈 버는건데, 행복 팔아서 돈 버는 거였어' 라는 말.
행복하기 위해서 최소한 갖춰져야 하는 조건은 반드시 있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다.
최소한의 조건이 주는 행복에 만족하고, 안빈낙도하는 것이 오히려 행복의 지름길 같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기준치가 달라서 그건 쉽지 않을것 같다.
"슬픔을 슬픔 이외의 것으로 뒤섞지 말아야 한다. 슬픔을 분노로 바꿔 왜곡시키면 스스로 애도의 시간조차 가질 수 없데 된다. 외로움을 배고픔으로 착각해 폭식하거나, 우울을 우울의 증상인 단순한 수면장애로 오해해 방치하면, 우리는 점점 더 깊이 병든다. 슬픔은 제대로 다뤄졌을 때에만 시간과 함께 자연스레 사라진다. 자기 안에 있는 감정들을 분리해 다독인다는 건, 나 자신을 아끼고 돌보는 행위이다."
-다행이다. 그녀가 말한 방식대로 나는 나의 슬픔을 위로해왔다. 아프다고 생각하면 시간을 가졌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는 푹 자버렸다. 시간을 달라고 말한 적도 있다. 나 회복 되어서 오겠다고.
그게 오해가 되어 끝나기도 한 적 있었고, 다시 만나서 오해를 푼 적도 있었다.
슬픔을 방치했을 때 제일 나답지 못했다.
처음 보는 내 모습이 낯설었다. 이겨내고 싶었고, 극복하고 싶었다. 다시 나로 돌아오고 싶었다.
그래서 나를 천천히 다시 돌아봤고, 나를 다독였다.
혼자 극복하는 근육을 단련하니까 안 보이던 것이 보였고, 나는 더 성숙해졌다.
그게 좋았다. 시련이 오면 힘들었지만, 반드시 교훈이 있었고 내가 더 익어간다는 뜻이니까.
그래도 가급적 슬픈 일은 없기를 바란다. 근육이 단련되어도, 상처는 매번 아프다.
"연애란 인간관계의 압축판이고, 그것의 본질은 끊임없는 질문이다. 연애에 있어 가장 좋은 상대는 어떤 사람일까.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는 비슷한 듯 다르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아서,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사람이 좋다. 함께 있을 때 마냥 좋은 사람이 아니라, 함께 있지 않아도 좋은 사람. 조금 더 정확히 말해, 함께 있지 않음이 더 이상 상처가 되지 않은 사람이 내겐 최고의 상대다.
누군가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준다는 건, 그 사람의 불안을 막아주겠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결핍을 누군가가 끝내 알아보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 결핍 안에서 공기가 되어 서로를 옥죄지 않고, 숨 쉬게 해야 한다. 그 사람이 옆에 없기 때문에 불편하고 불안해지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위성처럼 내 주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힘이 되고 따뜻해지는 사랑. 이것이야말로 떠날 필요가 없는 관계이다."
-몇 차례의 연애와 강렬한 기억이 지나고 난 뒤, 내가 내린 결론이 이거였다.
사실 이미 답은 알고 있었지만, 머리 속에서만 맴돌 뿐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믿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모든 것을 알아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기다렸던 것 같다.
사랑이, 연애가 나를 더 나답게 만들어줬다.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사람 옆에' 가게 해줬다.
답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어도, 상황과 타이밍이 안 맞는 변수는 여전히 존재한다.
여전히 해결해야 할 숙제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나는 그 속에서 헤매지 않아야 한다.
내가 이상적으로 그렸던 관계는, 손을 잡고 함께 앞을 보면서 같은 길을 걸어가는 관계였다. 함께 성장하는 관계.
연애 다음의 루트.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결혼이란 건, 말하자면 앞으로 저 사람이 네게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온갖 고통을 주게 될 텐데, 그 사람이 주는 다양한 고통과 상처를 네가 참아낼 수 있는지, 그런 고통을 참아낼 정도의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네가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이 될 거야. 살아가는 동안 상처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누가 주는 상처를 견딜 것인가는 최소한 네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선택해야만 해. 그러니까 이 남자가 주는 고통이라면 견디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결혼해. 그러면 최소한 덜 불행할 거야. 물론 행복을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말은,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라면, 때때로 견디는 일은 상상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 될 거란 얘기야!"
-결혼. 연애와 사랑의 결론은 결혼일까?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오래 살고 싶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드는 감정이다.
내가 생각했을 때 결혼을 하려는 더 근원적인 이유로는, 늙었을 때 외롭지 않고 싶어서일 것 같다.
어쨌든 '같이' 살아야한다. 오랜기간 동안 독립된 개체로 살았는데, 다시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
공동된 목표를 향해 가야하고, 공동된 울타리를 지켜야한다.
이걸 가능하게 하려면,
둘의 공통점이 아주 많거나 혹은
차이점을 좁혀나가려는 노력을 열심히 하거나 인 것 같다.
'누구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하다보면, 결혼에 대한 답도 설 것 같다.
"내가 아는 좋은 관리자나 좋은 부모의 특징은 역설적이게도 대부분 '덜 참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디테일에 집착하기보다는 전체적인 조화나 균형을 바라보면서, 꼭 나서야 할 곳에만 나서는 중용의 묘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난 이것이야말로 정말 어려운 일이다. 잘못 갈 길이 빤히 보이는데도 눌러 참으며 다시 되돌아오길 기다려주는 게 보통 일인가. 하지만 대부분 실수에서 배우고, 그 실수가 혹독할수록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덜 참견하기를 연습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오지라퍼이고, 참견하면서 누군가를 가르치고 성장시키는 일을 꽤나 오래했다. 그래서 습관이 남아서, 참견하고 싶은 욕구가 곧잘 일어난다. 하지만 이것이 좋은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나서는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필요할 때만 나서기. 요청할 때만 도움을 주기.
자립할 수 있는 근육을 키우도록 기다리기.
이 모든 것이 우리 부모님이 내게 해주던 방식이었다.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려야지. 내가 가져가야 할 답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무엇이 인간답고, 무엇이 나다운 마지막일까. 일본의 유명한 코미디언이자 영화감독인 기타노 다케시는 오토바이 사고로 죽음 직전까지 간 이후, 이렇게 말했다.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을 가장 열심히 살아간다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란 질문은 정확히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가장 진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내가 친하다고 생각하는 나의 사람들에게는 말해뒀다. 나는 죽을 때 어떻게 죽고 싶은지. 내가 내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 장면은 이랬으면 좋겠다.
'나는 여행지에서 천재지변으로 죽고 싶다.'
이 이야기를 듣고, 다들 반응이 별로였다.
객사로 보였나보다.
저 말의 의미는, 나는 늙어서도 계속 여행을 할 거고 내가 죽는 순간에 누구도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는 마음이 담겨있다.
누군가 아프면 병원비며, 간호며 여러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할 희생과 수고로움을 덜어주고 싶다. 나는 갈 때 자유롭게 가고 싶다.
여행지에 온 이방인의 마음가짐대로 떠나고 싶다.
내가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계기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15살 때였을 것이다.
그때, 처음 죽음을 대면했다.
그리고 그건 내 트라우마가 되었고, 나는 제대로 추모하지도 못한채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죽음을 대면하고나서부터 치열하게 죽음을 고민했고, 내가 내렸던 결론은
저 먼 곳에서 이모가 보겠지? 내가 나중에 이모를 만나러 갔을 때 '후회없이, 멋있게 잘 살았더라~' 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나름 치열하게 매 순간을 고민했고 최선을 다 해서 살아왔다. 여전히 나는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려고 노력하고, 먼 미래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결정한다.
그래서 읽는 내내 감사했다. 나의 이런 노력과 아픔을 그녀가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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