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하나 챙겨봤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
표절 논란이 있었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와 독백들이 마음에 들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예쁜 글귀들의 출처를 따라가보니 이 시집의 지은이였다.
이미 드라마 속에 등장한 시집은 예약상태거나 대출되어 있어서 예전에 나온 시집을 먼저 대출해서 읽어보았다.
이 드라마가 주는 그 따뜻한 분위기, 힐링을 해주고 심심하게 위로를 건네주던 그 느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바다가 보고싶어서, 앞으로 평일에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게 되어서, 급 떠난 바다 여행의 메이트로 이 시집을 데려갔다.
읽으면서 편안했다.
내 이전의 생활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생활을 맞이해주도록 도와주었다.
특히 마음에 드는 시들을 함께 남겨본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여름에 부르는 이름>
방에서 독재했다
기침은 내가 억울해하고
불안해하는 방식이었다
나에게 뜨거운 물을
많이 마시라고 말해준 사람은
모두 보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팔리지 않는 광어를
아예 관상용으로 키우던 술집이 있었다
그 집 광어 이름하고
내 이름이 같았다
대단한 사실은 아니지만
나는 나와 같은 이름의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벽면에서 난류를
찾아내는 동안 주름이 늘었다
여름에도 이름을 부르고
여름에도 연애를 해야 한다
여름에도 별안간 어깨를 만져봐야 하고
여름에도 라면을 끓여야 하고
여름에도 두통을 앓아야 하고
여름에도 잠을 자야 한다
잠,
잠을 끌어당긴다
선풍기 날개가 돈다
약풍과 수면장애
강풍과 악몽 사이에서
오래된 잠버릇이
당신의 궁금한 이름을 엎지른다
<저녁 -금강>
소멸하는 약력은
나도 부러웠다
풀 죽은 슬픔이
여는 길을 알고 있다
그 길을 따라올라가면
은어가 하루처럼 많던 날들이 나온다
저녁 강의 시야가 그랬다
출발은 하겠는데 계속 돌아왔다
기다리지 않아도 강변에서는
공중에서 죽은 새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땅으로 떨어지지도 않은
새의 영혼들이
해를 등지고
다음 생의 이름을
점쳐보는 저녁
당신의 슬픈 얼굴을 어디에 둘지 몰라
눈빛이 주저앉은 길 위에는
물도 하릴없이 괴어들고
소리 없이 죽을 수는 있어도
소리 없이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우리가 만난 고요를 두려워한다
<문병 -남한강>
당신의 눈빛은
나를 잘 헐게 만든다
아무것에도
익숙해지지 않아야
울지 않을 수 있다
해서 수면은
새의 발자국을
기억하지 않는다
오래된 물길들이
산허리를 베는 저녁
강 건너 마을에
불빛이 마른 몸을 기댄다
미열을 앓는
당신의 머리맡에는
금방 앉았다 간다 하던 사람이
사나흘씩 머물다 가기도 했다
<눈을 감고>
눈을 감고 앓다보면
오래전 살다 온 추운 집이
이불 속에 함께 들어와
떨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저는 한 번 잃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앞으로 만날
악연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시령이나 구룡령, 큰새이령 같은
높은 고개들의 이름을 소리내보거나
역을 가진 도시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면
얼마 못 가 그 수첩을 잃어버릴 거라는
이상한 예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하나하나 반찬을 물으면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손을 빗처럼 말아 머리를 빗고
좁은 길을 나서면
어지러운 저녁들이
제가 모르는 기척들을
오래된 동네의 창마다
새겨넣고 있었습니다
<2박 3일>
한 이삼 일
기대어 있기에는
슬픈 일들이 제일이었다
그늘에서 말린
황백나무의 껍질을
달여 마시면
이틀 안으로
기침이 멈추고
열이 내렸지만
당신은 여전히
올 리가 없었다
오늘은 나와 어려서
함부로 입을 대던 아이의
연담이 들려와
시내로 가는 길에
우편환을 보낼까 하다
나서지 않았다
이유도 없이 흐려지는
내 버릇도
조금 고쳐보고 싶었다
<입속에서 넘어지는 하루>
길눈이 어두운 겨울이나
사람을 잃은 사람이
며칠을 머물다 떠나는 길
떠난 그 자리로
가난한 밤이 숨어드는 길
시래기처럼 마냥 늘어진 길
바람이 손을 털고 불어드는 길
사람의 이름으로
지어지지 못하는 글자들을
내가 오래 생각해보는 길
골목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림자로 남고
좁고 긴 골목의 끝을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다 지새워지는 길
달이 크고
밝은 날이면
별들도 잠시 내려와
인가의
불빛 앞에서
서성거리다 가는 길
다 헐어버린 내 입속처럼
당신이 자주 넘어져 있는 길
<당신이라는 세상>
술잔에 입도 한번 못 대고 당신이 내 앞에 있다 나는 이 많은 술을 왜 혼자 마셔야 하는지 몰라 한다 이렇게 많은 술을 마실 때면 나는 자식을 잃은 내 부모를 버리고 형제가 없는 목사의 딸을 버리고 삼치 같은 생선을 잘 발라먹지 못하는 친구를 버린다 버리고 나서 생각한다
나를 빈방으로 끌고 들어가는 여백이 고맙다고, 청파에는 골목이 많도 골목이 많아 가로등도 많고 가로등이 많아 밤도 많다고, 조선낫 조선무 조선간장 조선대파처럼 조선이 들어가는 이름치고 만만한 것은 하나 없다고, 북방의 굿에는 옷이 들고 남쪽의 굿에는 노래가 든다고
생각한다 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버리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버릴 생각만 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도 한다
술이 깬다 그래도 당신은 나를 버리지 못한다 술이 깨고 나서 처음 바라본 당신의 얼굴이 온통 내 세상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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