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하고 냉정할 것. 이것은 예술가의 지상 덕목이다.”
다시 김영하의 작품으로 돌아왔다.
확실히 한강의 작품을 읽고 여운이 가시기 전에 김영하의 작품을 읽고 나니 둘의 차이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마치 하루에 두 편의 영화를 몰아서 봤을 때 두 영화의 차이점이 더욱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 처럼.
김영하가 서술하는 방식이 객관적인 편이라서 좋았지만 그의 말마따나 오히려 ‘건조하고 냉정한’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한강 작품의 <흰>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얇은 두께감에서 우선 호감을 준다.
하지만 그 두께감 속에 함축적인 것을 담아뒀다.
이 컴팩트함이 이 책의 매력이다.
미술 작품을 보는 것은 내 취미 중 하나다.
모든 작품이 그렇겠지만 독자에 따라,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다.
나는 일반적인 해석도 좋아하고 나만의 해석도 좋아한다.
나는 꽤나 수용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해석을 먼저 읽는 편은 아니다. 나만의 해석에 개입될 여지가 많아서.
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스토리를 먼저 읽는 것은 좋아한다. 그래야 더 풍부하게 상상할 수 있어서.
“파리는 세속적인 곳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정치적, 예술적 자유의 성지이고 그 자유를 알리는 외침이거나 그것에 대한 숨은 바람이다.”
이 구절을 봤을 때 파리에 여행을 갔을 때의 그 느낌이 떠올랐다. 아직도 생생하다. 낭만과 예술의 도시.
하지만 언제나 현실은 조금 다르다.
내게 다가온 집시 소녀, 에펠탑 키 체인을 팔며 “원 달라!”하던 흑인들.
그리고 너무도 오래된 지하철에서 나는 오줌 지린내, 내가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쥐와 비둘기.
파리는 내게 그런 곳이었다. 양 극단이 공존하는 곳.
거지도 많지만 부자도 많다.
낭만도 있지만 현실도 있다.
내가 아끼는 후배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언니와 그 분이 파리 같은 곳에서 만났다면 더 예쁜 사랑을 하며 만났을 것 같아요.” 라고.
사람들에게 박혀있는 파리는 사랑이 가득한 도시다.
파리의 건물들과 도시가 주는 분위기는 로맨틱함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정교하게 계획된 도시 모습으로 건물의 높이가 일정하다.
비교적 낮은 건물 높이로 어디서든 보이는 맑은 하늘과 아름다운 석양. 그리고 그 아기자기함 사이에 우뚝 선 에펠탑.
많은 연인들이 서로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거침이 없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행복해하는 곳이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파리는 이런 모습이겠지만,
사실 파리는 많은 역사를 거쳐간 곳이다.
단두대가 설치되었고, 공포정이 시행되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거처했었고, 혁명가들이 혁명을 이뤄냈던 곳이다.
어떤 관점으로 볼 것인지, 내 사상과 신념을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에 따라 파리의 색깔은 많이 달라진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내면의 충동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책에도 서술되었듯이 자신도 모르게 한 작품에 시선이 오래 머무는 것은 그 사람의 무의식에 합치하는 부분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마그리트의 작품은 나의 무의식의 어떤 부분에 합치된 것일까?
역설을 통해 본질을 꿰뚫는 그런 점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 부분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의 화자는 고객들을 찾아나선다. 자신의 작품에 영감을 줄 고객.
그리고 그 고객들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 자신의 작품을 쓴다.
“이 시대에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단 두 가지의 길이 있을 뿐이다. 창작을 하거나 아니면 살인을 하는 길.”
신이 되려는 열망은 인간의 역사에서부터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군.
신의 존재 여부부터 확실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이 되려는 자는 가득하다.
각자가 믿고 싶은 논리로 교리를 만들고 규칙을 만들어낸다.
나는 묻고 싶어졌다.
-신이 되면? 뭐가 좋지?
-완벽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신이 되는 것은 이미 선택지에 없을텐데?
화자는 이 과정을 통해 의뢰인들을 연민하고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연민하고 사랑한다는 말이 별로 좋게 들리지는 않았다.
마치 자신은 이미 완벽하고 모든 것에 통달했으며, 의뢰인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음을 상정하는 것 같다. 이미 자신이 신이라고 강력하게 믿고 있는 듯하다. 권력관계를 그려 둔 그의 사고 체계가 여실히 보였다.
의뢰인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이런 식의 연민과 사랑이 아닐텐데...
‘유디트’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세연.
그녀는 거짓말과 진실을 뒤섞으며 말한다.
때로는 진실을 거짓으로 말하고, 거짓을 진실처럼 말한다.
그것이 그녀의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유디트’는 사실 클림트의 작품으로 더 이름이 알려졌지만, 많은 여성화가들은 그녀의 영웅성에 집중하여 꾸준히 그녀를 그려왔다.
클림트의 그 금색 향연들이 유디트의 관능성을 극단적으로 나타냈지만
사실 ‘유디트’에게는 책임감과 용기가 그녀의 상징이나 다름 없다.
C가 세연이라는 여성을 ‘유디트’라고 일컫는 것은 그녀의 관능성과 파멸성에 초점을 맞춘 것 같다.
세연은 성관계를 가지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형(C)과 동생(K) 모두와 잠자리를 가지고 그녀는 그것에 일말의 죄책감이나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화자는 유디트(세연)의 얘기를 듣고 클림트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비엔나로 향한다.
비엔나는 내가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 도시 중 하나이다. 오랜만에 그 이름을 보니 반가웠다.
화자는 -전시되어 있는 클림트의 작품-유디트를 바라보는 동안 홍콩 출신의 여성을 만난다.
화자는 자신을 지옥에서 온 소설가라고 소개하고 그녀와 섹스를 한다.
여행자의 낭만, 하룻밤의 섹스.
그녀와 여행 일정을 일부 공유하며 그들의 관계는 몇 번을 더 지속한다.
둘은 피렌체로 향했고 거기서도 함께 밤을 보낸다.
그리고 유디트(세연)는 가스로 자살한다.
그녀의 자살을 도우는 역할이 화자의 역할이었다.
죽음을 선택하게 한다는 것에서 그는 신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또 한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미미.
그녀는 퍼포먼스를 하는 여성이다.
C는 비디오 아트를 하는 남성으로 미미의 퍼포먼스를 기록하려고 한다.
하지만 미미는 자신의 퍼포먼스를 기록하는 것을 거부해왔다.
C의 부탁에 촬영을 허락한다. 그러나 기록된 영상을 보고난 뒤 상영을 거부한다.
C는 미미의 거절에 당황하지만 이 작품을 완성시킬 것에 집착한다.
“집착의 강도는 어떤 일에 들인 시간의 양에 대체로 비례한다. 애정도, 예술도, 다른 모든 것도 이 법칙에서 그리 자유롭지 않다고 그는 생각해왔다.”
집착.
나는 집착을 정말 싫어한다.
정말 싫어하는 것을 넘어 두려워한다.
집착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음을 배웠기 때문에.
그래서 집착을 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과는 가까이 하지 않는다. 곁에 두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집착을 할 것 같은 두려움이 느껴지면 도망간다.
나도 결국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100% 믿지는 않는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무슨 거창한 이유를 가지고 그러는 거 같지만 아냐. 단 한 번도 나를 들여다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어디론가 계속 도망치고 있는 기분으로 나는 평생을 살아왔던 느낌이었어. 여기가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나는 이러저러한 것들로부터 계속 도망치고 있었던 거지.”
자살을 통해 죽음을 완성하고 신이 되는 것.
신이 되려는 열망을 자살로 해소한다.
완벽한 인간이 되는 것을 넘어 신이 되는 것이 목표라면 당연히 자살도 목표에 있을 것이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그동안 거부해 왔던 것을 하는 것.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하던 것을 이겨보는 것.
나는 또 묻고 싶어졌다.
-꼭 ‘마지막’이라는 전제가 붙어야 하는 이유는 뭔가?
(마지막이라서 낼 수 있는 용기라면 이미 그 사람 내면에 그만큼의 용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완성을 위한 마지막 단계에 꼭 자살이 있어야 하나?
(자신이 생각하는 완성이 다 다를텐데 많은 마지막의 모습 중에서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는 얼마나 될지 가늠이 잘 가지 않는다)
한때 내 마지막은 내가 선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가 원하는 나이에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공간에
내가 원하는 지위에
그때의 내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았을 때만 가능하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은 순간부터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없다.
그 말은 내 깊은 내면과 무의식의 한가운데로 빠져서 수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맺은 관계에서 나는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책임과 의무를 수행하며 때로 행복하고 때로 아파한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피곤하게 하지는 않는다.
나에게 굉장한 짐이 되지는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 때문에.
그저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발생하는 기회비용에 미련이 남는 것 뿐이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나는 외로움이 많은 유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를 완성시키는 방법을 자살이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를 채워나가고 싶다고.
그래서 사람들과의 만남에 최선을 다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고 싶었고, 그들이 내게 와서 쉴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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